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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강진여행

[강진여행] 영랑 김윤식 시인의 생가, 영랑 생가

by 서이__ 2023. 2. 1.

겨울이라 그런지 주말인데도 사람이 없다. 한적한 강진군청 작은 골목 귀퉁이를 걷다 보니 우리나라의 대표 서정시인이자 항일 민족지사여던 영랑 김윤식 선생의 생가, 영랑생가를 만났다. 영랑생가는 2007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3동만 남아 있고, 주변에는 영랑의 시의 소재가 되었던 ,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 강진 영랑 생가 (康津 永郞 生家)

 

 

이용시간 : 09 ~ 18

이용요금 : 무료 (주차시설 있음/무료)

주소 :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5

 

 

초가지붕을 나란히 하고 있는 어디를 먼저 가야할까. 발길 닿는대로 우선 정면에 있는 안채로 들어가 보았다. 생가의 본채는 정면 5, 측면 1칸인 초가집이지만 뼈대가 굵은 네모기둥을 사용한 규모가 집이다. 상량문에 “광무 10 병오 4(光武十年丙午四月)…”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집의 건립연대는 1906년임을 있다.

 

 

 

 

선생은 1903 1 16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경무 사이에 2 3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 3 강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상경하여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한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에는 주로 아호를 사용했다. 휘문의숙 재학시절이던 1919 3 1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넣고 강진에 내려와 독립운동(강진4.4운동)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뤘다고 한다.

 

 

영랑 생가 안채 안방

 

 

1920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에서 수학한 선생은 용아 박용철 선생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23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에는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는데 1930 3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더불어 우리 현대시의 장을 열었다. 1934 4 [문학] 3호에 불후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발표하였으며 1935 [영랑시집] 1949년에는 [영랑시선] 출간하였다.

 

 

옆으로 길게 이어진 안채 마루

 

 

선생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삭발령을 거부한 흠결 없는 대조선인으로 외롭고 외롭게 살았다. 광복 신생 조국 정부에 참여하였던 선생은 1950 한국전쟁 부상당하여 9 29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은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작품이다.

 

 

 

 

다락처럼 약간 올려진 방과 아궁이의 위치가 특이하다. 겨울철 난방을 하려면 부엌에서도 떼고 아궁이에서도 떼고 부지런히 불을 지펴야 같다.

 

 

안채 옆과 모습

 

안채 부엌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모방이라고 되어있는데 찾아보니 식모방인 하다.

 

 

부엌과 천정

 

 

장독대와 시비

 

 

문간채

 

 

 

 

영랑 생가 입구에서 어디를 먼저 들어가야 하나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본채와 사랑채는 하나의 작은 문으로 이어진다. 사랑채는 흔히 안채 앞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영랑생가는 옆으로 길게 위치한다.

 

 

 

 

사랑채는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오히려 본채보다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특이한 것은 전면과 양측 2칸에 ㄷ자형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우측 1칸에는 마루 앞에 나지막한 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안상형(眼象形) 궁창(문의 하부에 낮게 끼워 ) 뚫었다. 창문은 이중창문으로 내창은 아자(亞字) 모양의 미서기창이며 외창은 띠살 모양의 여닫이창이다. 사랑채는 1930년대 건물로 전해지고 있다.

 

 

 

 

생가 마당의 은행나무는 매년 가을이면 아름다운 빛을 뽐낸다는데 겨울이라 가지만 앙상하다. 한눈에 보아도 크기로 나이가 많다는 짐작이 간다. 은행나무는 누가 심었고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김학동이 김영랑 전집.평전이라는 영랑 산문집에는 ‘감나무에 단풍 드는 全南의 9 《朝光》1938 9월’에 보면 ‘뜰 앞에 은행나무는 우리(영랑) 부자가 땅을 파고 심은지 17, 8년인데 아름이나 되어야만 은행을 알고 기다리지도 않고 있었더니 천만의외 여름에 열매를 맺었소이다. 몸피야 뼘으로 셋하고 , 그리 크잖은 나무요, 열매라야 은행 알인데 가족이 이렇게 기쁠 때가 없소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미뤄봤을 1920년경 영랑 선생과 부친 김종호씨가 심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있다. 일반적으로 10년정도 되는 묘목을 심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110 정도 수령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랑 생가는 1948 김윤식이 서울로 이거한 차례 주인이 바뀌고 1970년대에는 농가개량사업의 일환으로 초가지붕이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85 강진군에서 매입하고 1986 2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92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원형대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 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2007 10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며 문화적으로는 재능과 지식을 갖춘 영랑 김윤식의 생가라는 역사문화적 가치와 함께 20세기 초반 건조물인 전통한옥과 근대 건조물의 이행기의 가옥으로서 문화변용의 형태도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더불어, 영랑의 문학적 세계를 후손에게 길이 체감할 있는 공간으로 가치가 중요하다.